조선 전기의 조직과 외교
- 역사
- 2021. 7. 15.
조선 전기의 조직
의정부는 재상들의 합의로 운영되었고, 정책을 심의하고 결정하여 국정을 총괄하는 역할을 하였다. 의금부는 국왕의 직속 특별 사법 기구인데, 반역죄, 강상죄 등 중범죄를 다스리는 역할을 하였다. 승정원은 왕명의 출납을 맡은 왕의 비서 역할을 하는 기관으로, 도승지를 비롯한 6명의 승지가 있었다.
조선시대의 언론 기능을 담당한 사헌부, 사간원과 홍문관을 합쳐서 3사라고 불렀다. 사헌부는 관리를 감찰하고 자격을 심사하는 기관이고 사간원은 정책에 대한 간쟁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조선시대의 대간은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리로 구성되었는데, 5품 이하의 관리를 임명하는 과정에서 서경권을 행하였다.
홍문관은 혹당이라고도 불렸으며, 왕에게 경서와 사서를 강론하는 경영을 주관하였다. 조선시대의 수도의 행정과 치안을 담당한 관청은 한성부였다. 조선시대 실록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업무를 담당한 기관은 춘추관이었다. 장례원은 노비의 호적과 소송에 관한 일을 관장하였다. 조선은 전국을 8도로 나누었으며 각 도에 관찰사라는 관리를 파견하였다. 8도 아래에는 부, 목, 군, 현이 있었으며 각각에 파견된 수령은 지방의 행정, 사법, 군사권을 행사하였다. 조선시대의 수령의 의무중 하나는 수령 7사가 있다.
조선 전기의 외교
조선은 명에 대해서는 사대를, 여진, 일본과 유구 등에 대해서는 교린을 표방하였다. 조선 초기 태조와 정도전이 요동 정벌을 주장하여 명과의 관계가 악화되었으며, 세종 때 김종서가 여진을 몰아내고 6진을 설치하였다. 4군 6진 개척 이후 이 지역에 대한 사민 정책과 토관 제도가 실시되었다. 조선은 한양에 온 여진의 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북평관을 개설하여 조공 무역을 허락하였다. 국경 도시인 경성과 경원에는 무역소를 설립하여 여진을 회유하는데 사용하였다.
이종무가 왜구의 근거지인 쓰시마섬을 정벌하였으며, 조선은 일본에 대한 회유책의 하나로 초량에 왜관이라는 것을 설치하여 개시 무역을 실시하였다. 세종 때 3포를 개항하고 계해약조를 체결하여 제한적인 무역을 허용하였다.
중종 때는 외적의 침입 등 군사적인 사안에 대비하기 위해서 임시 기구였던 비변사가 설치되었는데, 비변사는 명종 때 을묘왜변을 계기로 상설 기구가 되었다. 일본군에게 부산진 등이 함랑되자 신립은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항전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의 3대 대첩은 권율의 행주대첩, 김시민의 진주 대첩,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조와 명의 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하였는데, 이순신이 명량에서 왜의 수군을 대파하였고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 정책을 추진하였다. 광해군 때 후금과 전쟁 중이던 명의 요청에 따라 강홍립이 이끄는 부대가 파병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요청으로 공식적인 외교 사절인 통신사가 다시 파견되었고 광해군은 인조반정이 이일어나 폐위하게된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정구그이 주도권을 장악하였으며 인조와 서인정권은 외교적으로 친명배금 정책을 펼치게된다. 이후 후금은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정묘호란을 일으켰으며, 정묘호란이 발생하자 조선 왕실은 강화도로 피난을 가게된다.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꾼 후 조선에 군신 관계를 요구하였으며 조선을 침략하여 병자호란을 일으킨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고,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을 하면서 병자호란이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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