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기

흥선 대원군

흥선 대원군은 삼국부를 부활시켜 군국 기무를 전담하게 하였다. 비변사를 혁파하고 의정부의 기능을 부활시켰으며, 대전회통을 편찬하여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흥선 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세우고자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경복궁 중건을 위해 원잡전을 강제로 지수하였으며, 재정 문제를 해결하고자 당백전을 주조하였다.

 

흥선 대원군은 전국의 서원을 47개소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으며 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호포제를 실시하였다. 확곡의 폐단을 바로잡고자 사창제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최익현은 고종의 친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려 흥선 대원구의 하야를 이끌어 냈다. 1866년 프랑스의 선교사와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된 병인박해가 일어났다. 병인박해가 구실이 되어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침략한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당시 양헌수 부대가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하였고 프랑스군에 의해 외규장각 도서가 약탈당하기도 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미군이 강화도를 침략하였다. 신미양요 당시 어재연 장군이 이끄는 붇가 광성보에서 항전하였다. 어재연이 지키던 광성보가 함락되자 사자기를 미군에 빼앗겼고 흥선 대원군은 신미양요 후 종로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건립하였다.

 

개항 이후

인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에 접근하여 무력시위를 벌였다.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조약인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었다. 강화도 조약은 부산, 원산, 인청에 개항장이 설치되는 결과를 가져오게된다. 이 조약은 조선이 일본에 해안 측량권과 영사 재판권 등을 인정한 불평등한 조약이었다.

 

조선과 일본의 무역 규칙에서는 양곡의 수출을 허용하되 관세를 설정하지 않았다. 조일 수호 조규 부록에서는 거류지를 10리로 제한하고 개항장에서 일본 화폐의 유통을 허용하였다. 개항 이후 정부는 개화 정책을 담당하는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소속 부서로 교린사, 군무사, 통사사 등 12사를 두었다.

 

종선 정부는 청에 연선사를 파견하여 근대식 무기 제조 기술과 군사 훈련법을 배워오게 하였다. 연선사는 귀국 후 근대식 무기 제조 공장인 기기창의 설립을 주도하였다. 강화도 조약 체결 직후 김기수가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제 2차 수신사 김홍집은 귀국할 때 청의 외교관 황준헌이 지은 조선책략을 가지고 들어왔다.

 

조선 정부는 일본에 암행어사의 형태로 조사 시찰단을 파견하였다. 이만손 등 유생들은 조선책략 유포에 반발하여 영남만인소를 올렸다. 별기군 창설 이후 구식 군인에 대한 차별 대우가 발단이 되어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임오군란이 청군에 의해 진압되면서 청의 내정 간섭이 본격화되었다.

 

동학 농민 운동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한다는 구실로 거문도를 분법 점령하였다. 갑신정변 이후 유길준은 서유견문을 집필하여 서양의 근대 문물을 소개하는 한편 한반도의 중립화를 주장하였다. 동학교도는 공주, 삼례 등지에서 교조 신원 운동을 전개하였다.

 

동학 농민군은 백산에 집결하여 4대 강령을 발표하고 보국안민, 제폭구민을 기치로 내걸었다. 농민군은 1차 봉기 때 황토현 전투와 황룡촌 전투에서 관군을 물리치고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농민군은 정부와 전주 화약을 맺은 후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 개혁안을 실천하였다.

 

일본이 경복국을 점령하고 내정 개혁을 요구하자 동학 농민군의 제 2차 봉기가 일어났다. 2차 봉기는 남접과 북접이 연합하여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보국안민을 기치로 우금치에서 관군과 일본군 연합에 맞서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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